내 믿음의 고백

행복한 시절

테너 2016. 7. 9. 22:50

 



 

 

학원 강사로 어린 중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중학교에서 고교를 들어가기 힘든 연합고사가 있던 때였고

중학교 학생 중 1/3은 시외지역으로 나가서 고교를 다니던 시기였으니

 

시외지역으로 나가는 것이 싫은 중학생들은

1년씩 재수하여 다시 연합고사를 치루던 때여서...

중 재수생을 가르친 학원강사로 있던 시기였다.

내가 젊은 시절 대학에서 보낸 시절은 부모님도 안 계시고

누나들도 시집 가고 여동생 한명 남아서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니고 여동생은 여고를 다닐 때

불가능한 일들이 현실로 이뤄지던 시기였다...

특히 등록금 문제는 가장 큰 문제였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큰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가난뱅이 고학생이란 걸 아는 

과 여학생은  나에게 관심을 보인 여자는  없었다.

어느날 솔직한  후배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아저씨(군대 다녀 온 남학생의 호칭)는 참  호감이 가는 사람인데

가난하고 또 공부에만  몰두하고 낭만도 멋도 모르고

뒷배경이 없는 빈대(가난뱅이)라는 말을 해줬다.

 

그 이야기를 듣고 떠나간  사람들이 떠올랐지만

그걸  인정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공부에 만 몰입하던 내 모습은 오히려 큰 자부심이 되었다.

학교에서 추천받아 MBC. TV에 우리가곡 출연을 할 때

입고 녹화해야 할 양복이 없어서.. 선배님의 옷을 빌려입고

노래부르던 기억과 얼굴 분장을 하고

거울을 잠깐 보는 순간 거울 속의 젊은이 모습이

준수한 청년으로 보이던 행복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오직 대학 졸업을 하는 목표가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생각되던 시기였으니...

학원과 경비실 ...주일날은 교회...목표를 위해

멋도 낼 수 없는 가난뱅이에 낮에는 학교에 가고

오후 시간을 내어 헐레벌덕...

학원에 와서 재수생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다시 경비실로 달려가서

밤 경비를 보다가  자정이 지나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승용차는 다닐 수 없지만

경비실의 1톤 트럭은 어디든 갈수 있었던 때였다...

이틀에 한번 꼴로 대학의 음악 연습실로 가서

피아노 연습과 건반화성 숙제를 하고

새벽 혼자 연습 하던 기억은 참 행복했었다

 

새벽에 와서 공부를 하는지 누구도 모르던 일과였으니...

그 때 음악 연습실을 열어주신 경비 할아버지에게

졸업 한뒤 찾아가서.. 선물드리며 큰절을 올렸던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할아버지 말씀이  고생하며 대학을 다니는 모습에 

잘될 것이라고 믿었다는 말씀은 기분 좋은 찬사였다.

 

졸업 할 때까지 등록금 전액을 받는 수상자가 되었다.

나에게 장학금이 없다면 졸업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환경이 만들어낸 산물이었으니...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해 주신 교수님의 호의와

공부 할 때 도움 주던 손길을 잊을 수 없다

장학금을 받아 들고 감격했던 기억... 무이자로 방을 얻을 수 있도록

돈을 빌려 주셨던 집사님들의 호의와 암암리에 도움 주던 손길들

 

날라리 같은 음대 여학생들 공부도 않고

시험 기간에 컨닝하려고 뒤에서 자꾸 귀찮게 하고... 

입은 옷 자랑이나 하며 겉 멋에 빠진 모습들을 볼 때

허영심 가득한 속물들로 밖에 보이질 않았던 기억들...


그러나 졸업 후 그녀들은 의사부인이나 국회의원 며느리

총장의 아내.. 모 대통령 후보의 부인도 음대를 나온 사람으로

뒷배경이 든든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 때는 어릴때라

나처럼 절박한 처지에 놓인 고학생과는 다른 세상의 귀한 집 딸이라서

내 생각이 잘못 판단 된 유복한 가정의 규수였다.

 

교사로 발령 받고 시립합창단과 교회 찬양대 지휘를 하여

돈에 여유가  생겨 옛날 도움 받은 고마움을 보답하기 위해 

어려운 학생들에게 익명으로  장학금을 기부하던 때가 참 행복했던 기간이었다.


그때 아가씨들과 여고생 제자들의 총각선생을 향한 관심과

교회에서 직장에서 시립합창단에서 육탄공세로 나오던 여성들의 애정공세도

잊을 수 없는 젊은 날의 추억...그러나 첫사랑의 결혼 소식은 우울한 소식이었다.

 

나중 아내가 발병하여 돈이 많이 들어가서 기부를 못하던 때

내가 기부했던 액수 보다 오히려 엄청 많은 입원비를 보내준

지인들의 사랑도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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